'푸근한 미스' 아나운서 이금희
□글·신을진 기자 / 사진·김용해 기자 |
작년 봄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를 만난 이후 가끔 통화를 하거나 방송국에서 마주칠 때면 내 입에서는 습관처럼 “무슨 좋은 일 없으세요?”라는 질문이 튀어나왔고 그때마다 그는 복사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좋은 일 생기면 제일 먼저 연락할게요”라고 응수했다.
어느날인가 출근을 해서 보니 책상 위에 내 이름이 씌어진 노란 봉투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책표지에 그의 웃는 얼굴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튀고 싶지 않다> 라는 상당히 ‘튀는’ 제목의 표지 아래 ‘이금희’라는 이름 석자가 흰글씨로 수줍은듯 다소곳하게 박혀 있다. 그가 말한 ‘좋은 일’이 바로 이 책 얘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기자가 말한 ‘좋은 일’(일반적으로 노총각, 노처녀들에게 묻곤 하는)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어쨌든 반가운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금희 아나운서는 산뜻한 커트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밝았지만 스스로 ‘달덩이같다’고 표현하던 얼굴이 약간 수척해보였다. 흔히 여자들이 “어머, 살 빠졌어요” “얼굴이 안돼보이네요” 하는 말을 들으면 “어머, 그래요?” 하면서 은근히 기분좋은 웃음을 짓는 데 비해 그는 정말 걱정스러운 얼굴로 “책 쓰는 동안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방송에 데뷔하면서 몸무게가 줄어드는데 나는 하도 잘 먹고 잘 자는 탓에 방송사에 입사하고 나서부터 매년 1킬로그램씩 꾸준히 늘어왔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던 그녀가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만든 책은 어떤 것일까. ‘튀어야만 성공하는 세상에 평범으로 맞선 방송인 이금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에는 그가 라디오 리포터, 모 회사 비서를 거쳐 재수 끝에 89년 KBS 아나운서로 입문하기까지의 과정, 혹독한 아나운서 연수 및 여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발탁되는 과정이 숨김없이 그려져 있다. 화려한 스튜디오 뒤에서 벌어지는 숨은 이야기들과 같은 아나운서실에서 만난 2년동안 사랑했지만 이젠 남남이 된 가슴아픈 러브스토리도 처음으로 고백했다. 이금희씨, 왜 결혼 안해요? “책 쓸 시간을 따로 낼 수 없는 형편이라, 매일 방송 끝나고 나면 아나운서실에 혼자 남아 글을 쓰고 자정 무렵에 퇴근하는 생활을 몇 달간 계속했어요. 글을 쓰고 교정을 보고 할 때까지도 잘 몰랐는데, 이렇게 책이 돼서 나온 걸 보니까 너무 좋아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영상세대라서 문자에 대한 감각이 다르겠지만 제가 자랄 때만 해도 책이란,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이었거든요. 제 책이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었는데, 좋기도 하고 또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요.” 출판사로부터 책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자고 일어나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들 위에 내 책을 한 권 더 얹음으로써 출판 공해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그를 움직인 건 방송에서 보여지는 ‘아나운서 이금희’가 아닌, 자연인 ‘이금희’를 보여줌으로써 사람들과 좀더 가까워지고 진솔한 만남을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학창시절, 똑같은 교복입고 수업만 받다가 어느날 수학여행을 가서 사복입고 춤추는 친구를 보면서 “어머, 쟤가 저렇게 춤을 잘 췄구나” 하고 새삼 다른 느낌을 갖게 되고 그래서 더 가까워지는 것처럼…. “올 2월로 방송생활한 지 딱 10년이 됐어요. 개인적으론 10년이라는 시간을 정리하는 의미도 되겠고… 방송을 하다보면 프로그램 구성에 묶이고 시간에 쫓겨서 하고픈 말들을 미처 꺼내보지 못할 때도 많거든요. 하루 24시간 중에 방송하는 시간을 빼고 난 나머지 시간은 또다른 ‘나’로 살아가는 건데, 그런 솔직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최근까지 낮에는 방송하고, 자정 무렵까지 사무실에 남아 글을 쓰고, 다음날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는, 남들 보기엔 피곤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계속했다. 프로그램에 묶여 주말에도 평일과 다름없이 일했고 게다가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까지 맡아 그야말로 하루를 시간별로, 분별로 쪼개고 또 쪼개서 써야 했다.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고 묻자 “따로 에너지를 쓸 데가 없어서” 그렇단다. 결혼이라도 했으면 살림하고 남편, 자식 돌보느라 에너지가 분산되겠지만 그런 쪽으로 에너지를 쓸 일이 없으니 남는 에너지가 남들보다 많다는 것. “마흔까지는 에너지가 많은 시기라고 생각해요. 마흔이 넘으면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게 되겠죠. 그때까지는 달려가고 싶어요. 결혼이란 것도 그렇게 앞으로 달려가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일단은 너무 큰 ‘변화’라고 생각하니까 두렵고 자신이 없어요. 솔직히 겁도 나고요. 제 주변엔 저같은 ‘어영부영’ 노처녀들이 꽤 많아요. 다들 자기일 열심히 하다 보니 나이만 먹고, 앞만 보고 오느라 옆을 못 본 사람들이죠. 제가 결혼 못한 건 아마 그런 미련함(?) 때문일 거예요.” “왜 결혼 안해요?” 하는 소릴 귀에 못이 박이게 듣다 보니 하나쯤 모범 답안이 필요할 것 같아 그는 질문을 해오는 사람들에게 “방송만큼 재미있고 매력적인 남자가 없어서요”라고 답한다. 농담처럼 하는 소리지만 그의 이 말에는 진담도 반쯤 섞여 있다. 그에게 있어 방송은 세상 어느 남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존재이다. 너무 멋져서 잘 보이고 싶은데 그러기엔 두렵고 어색한 상대. 그래서 방송 앞에서 그는 언제나 테리우스 앞의 캔디같은 심정이라고. “한꺼번에 프로그램을 몇 개씩 하다보니 하루종일 밥 한끼 못 먹는 날도 있어요. 10년동안 휴가 한 번 제대로 가본 적도 없고 아무리 아파도,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셨어도 아침에 시간 맞춰 마이크 앞에 서야 하는 어려움도 있고요. 그런데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홀어머니에 동생이 열두명이 딸린 장남이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듯이, 저 역시 그래요. 일이 너무 좋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좋아요. 방송 외에 다른 삶을 꿈꿔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해요. 저 아주 단순하고 멍청해요(웃음).” 유일했던 한사람과 헤어지면서 내가 얻은 것 그렇다고 그녀에게 진짜 ‘애인’이 없었던 건 아니다. 방송국에 들어간 지 1년쯤 지났을 때 같은 아나운서실에 근무하던 한 선배가 어느날부터인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에게 미국 유학중인 애인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한동안 혼자서 가슴앓이를 했다. 그러다 그가 여자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나서 자연스레 두사람 사이는 선후배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만나기를 2년여. 언제나 자신보다 그를 먼저 생각하고, 무조건 받아주고 무한하게 퍼주며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던 그녀는, 어느날부터인가 그가 약속시간에 늦어도, 아예 나오지 않아도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주위의 친구들이 하나둘 면사포 쓰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왜 결혼 안해요?”라고 묻고 싶은 것을 스스로 삭이며 그가 얘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만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도 많았고 그 사람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져 갔는데도 전 그의 변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알고 보니 1년 가까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더군요.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으니 그만 헤어지자’고 그사람이 말할 때도 전 그냥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야지요’라는 말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흔히들 그렇듯이, 그녀도 그와 만나는 동안 회사 동료들도, 친한 친구들도 다 제쳐놓았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유일했던 한사람이 떠나고 나자 그 한사람의 자리에 그동안 제쳐놓았던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빈자리를 채워 주었다. 그들은 기대어 울 어깨를 내주었고, 술상대가 되어 주었고, 이야기상대가 되어 그녀의 푸념과 투정을 다 받아주었다. 어느 시인은 ‘사랑을 잃고 나는 운다’고 노래했지만 그때 그녀는 알았다. 사랑을 잃으면 또다른 커다란 사랑을 얻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사랑을 잃고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발견한 건데, 그사람 만나고 있을 때 제가 끄적여놓은 말 중에 ‘내가 만약 이사람과 헤어지면 다시는 연애를 안할 거다. 일만 열심히 할 거다’라고 쓴 게 있었어요. 실제로 한동안은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어요. 상처가 컸던 탓에 다른 사람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죠. 그러다 스르르 나도 모르는 새 마음의 빗장은 풀어졌는데, 그 다음부턴 무지무지 바빠졌어요. 한꺼번에 5개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도 있어서 일년내내 단 며칠도 쉴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 누가 소개팅 하자 그러면 그 시간에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고, 친구나 영화나 한편 봤으면 좋겠고…. 그러다보니 여지껏 사람을 못 만났어요.” 말 그대로 ‘너무 바빠서’ 외로울 시간도 없었는데, 토요일 오후의 퇴근길에 자기처럼 혼자 차를 몰고 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때, 명절날 친척들이 돌아가면서 해댈 잔소리를 피해서 혼자 집을 나왔을 때, 그에게도 주체못할 외로움의 감정이 엄습한다. 비슷한 처지의 ‘어영부영’ 노처녀들이 많아 명절에도 함께 돌아다니며 밥먹고 공연도 보고 하지만, 특별한 누군가가 있었으면 할 때가 가끔은 있다. “이제 다시 누군가를 만나면 정말 열심히 사랑하고 싶어요. 조건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한달에 1백만원을 벌거나 1억을 벌거나 하루 세끼 먹는 건 똑같고, 왜 그런 말도 있죠. 쌀이 천석이면 근심도 천석이라고…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가도 무슨 무슨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거 우리가 흔하게 보는 일이잖아요. 돈이나 명예 같은 건 포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내용물이 중요한 거죠.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변할 수 있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은것이 더 중요하다 같이 일하는 여자 아나운서들이 다들 내로라 하는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을 보면서도 한 번도 부러워해본 적은 없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는 것, 스스로를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직업인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는 돈 없고 명예가 없어도 ‘속이 꽉 찬 사람’,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인정하고, 그 사람이 없을 때 빈자리가 크다고 느끼게 되는 사람을 만나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려갈 날을 기대한다. “예전에 미스코리아였던 누군가가 인터뷰하면서 그런 얘길 했어요. 자기는 아주 돈이 많은 사람과 결혼을 했었는데 쇼핑을 가서 ‘이 옷 마음에 든다’고 하면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디자인으로 일곱가지 색상이 있으면 일곱벌을 다 사줬대요. 우린 한 벌도 못 사는 옷을 일곱벌씩이나 산다니 얼마나 부러워요. 그런데 하는 말이 그런 건 하나도 기쁘지 않다는 거예요. ‘이건 어떨까’ ‘저건 나한테 맞을까’ 벼르고 별러서 고민 끝에 정말 마음에 드는 옷 한벌을 샀을 때 그게 행복한 거라는 거죠.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도 행복하지 않으면 뭐가 좋겠어요? 돈이 없어서 옷 못 사입고 전기세, 수도세 아끼고 하면서도 가족간에 따뜻한 정을 나누고 사는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요. <아침마당> 같은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매일매일 느끼게 돼요.” 사람이 자라난 가정환경이 인생을 지배한다는 것을 그는 프로그램을 통해 깨달았다. 덕분에 결혼에 대한 생각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앞으로 결혼을 한다면 가정을 모든 일의 우선 순위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고, 남편·아이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상대방 위주로 생각하고 맞춰줘야 한다고, 뭐든지 그냥 얻어지는 건 없으며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거란 걸 그는 배웠다.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가 결혼생활, 부부관계 등의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다보니 한계도 있고 종종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지만 그는 결국 부부관계도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라고 생각한다. 남자라서, 여자라서, 남편이라서, 아내라서가 아니라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하고 문제에 접근하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아나운서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이금희. 그가 가진 인간적인 푸근함, 따뜻함, 다정함은 이제 ‘이금희 스타일’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고 있다. 그는 여러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도 사람이 있는, 사람이 느껴지는 프로그램을 선호하고 그런 프로그램에서 특유의 장기를 발휘한다. 왠지 뉴스 프로그램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 푸근하고 정많은 그의 모습과 태도에서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한다. 10년 동안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더없이 좋은 인생공부를 했다는 이금희 아나운서. ‘큰 나무숲 사이를 걸어나오니 내 키가 어느새 훌쩍 커져 있더라’는 어느 책의 말을 인용하면서, 방송과 함께 자신도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고 그는 또한번 밝게 웃으며 말했다. |